유쾌한 창조

유쾌한 창조

"내 그물에 걸려 올라온 은빛 반짝이며 퍼덕이는 물고기를 덕장에서 줄지어 말리고 있는 죽은 오징어처럼 만들지 말라.

유쾌하고 행복한 창조를 뜨거운 햇살 아래 그대로 드러나게 하라."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 지금까지 100여 권의 책을 쓰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강의, 강연 그리고 대담을 해온 그에게 아직도 하지 않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의 인터뷰어 강창래가 이어령과 만나 나눈, 아직도 남아 있는 이야기와 이어령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직접 만나보자.



이어령은 일흔일곱 살이다. 그가 1956년 ‘〈우상의 파괴〉를 쓰고 명동에 나가보니 유명해졌더라’는 게 스물셋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윤식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잘 돌아가기에 마치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람개비 같은’ 정열로 엄청난 양의 글을 써왔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강의와 강연 그리고 대담을 해왔다. 이어령이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이어령에게 더 이상 할 말이, 더 써야 할 글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어령은 여전히 현역이다. 끊임없이 창조적인 사업들을 벌이고, 글을 쓰며, 강연을 하고, 대담을 한다. 다작을 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환호를 받아온 이어령이지만 그 만큼 그에 대한 오해도 많다.

이 책《유쾌한 창조》는 현역 이어령의 건재함과 오해를 넘어 이해를 지향하며 2만 4천개의 직소퍼즐(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판매되고 있는 가장 많은 조각 수의 직소퍼즐이 2만 4천 조각이라고 한다)과 같은 그의 모습을 맞춰보는 책이다.



이번 인터뷰집의 키워드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이어령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수의를 마련하는 심정으로 추진하고 있는 세 가지 일,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창조학교’, ‘한국인 이야기’다. 그는 이 세 가지 일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 일들은 실패할 일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이어령은 왜 실패할 것이라면서도 이 일들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하게 밝힌다.



둘은, 이어령의 문학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어령의 문학을 둘러싼 ‘오해’라고 해야겠다. 이어령은 스스로를 “문학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글을 쓰는 문학이 아니라고 해도 ‘문학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어령의 정체성은 소설가나 시인 또는 극작가 쪽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활동이 다 ‘문학하는’ 일이라고 한다. 사실상 그는《장군의 수염》《환각의 다리》를 비롯한 소설과 시를 쓴,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다. 오랫동안 문예지《문학사상》의 주간을 담당했으며 비평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한마디로 뛰어난 문학가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이어령이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성이나 문학적 성과에 대한 평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아니면 평가 절하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한 편의 드라마가 있다.

저항문학을 외치던 이어령이 왜 뉴크리티시즘이나 기호학으로 갔는지, 1967년 말과 1968년 초에 걸쳐 치열하게 벌어졌던 김수영 시인과의 “불온시 논쟁”, 그 현장으로 돌아가 그 당시 어떤 일들이,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 현장검증을 해본다. 그러기 위해 “불온시 논쟁”의 주인공이었던 이어령과 김수영의 글, 여덟 편을 원문 그대로 시간 순서에 따라 실었다. 원문을 읽어보면 40여 년 전 그때로 되돌아가 그 현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평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옮고 그른지도 떠나서 이어령과 김수영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직접 알아보자. 책에 실린 불온시 논쟁 원문은 다음과 같다.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한국문화의 반문화성〉, 이어령, 조선일보, 1967년 12월 28일

〈지식인의 사회참여〉, 김수영, 사상계, 1968년 1월호

〈서랍 속에 든 ‘불온시’를 분석한다―〈지식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반론〉, 이어령, 사상계, 1968년 3월호

〈누가 그 조종을 울리는가?―오늘의 한국문학을 위협하는 것〉, 이어령, 조선일보, 1968년 2월 20일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오늘의 한국문학을 위협하는 것’을 읽고〉, 김수영, 조선일보, 1968년 2월 27일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오늘의 한국 문학을 위협하는 것’의 해명〉, 이어령, 조선일보, 1968년 3월 10일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김수영, 조선일보 1968년 3월 26일

〈논리의 현장검증 똑똑히 해보자〉, 이어령, 조선일보 1968년 3월 26일



셋은, 이어령의 창조성이다. 이어령은 “창조적인 사람”이다. 그의 창조성은 그의 작품들이나 그가 기획해 세계를 놀라게 한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어령은 사람들이 자신을 “크리에이터”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2009년에는 창조학교를 설립해 명예교장까지 맡고 있다. 그런 이어령이 ‘창조’라는 화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다음 세대를 위해 창조성을 배양하고 창조적인 사람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장에서 이어령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그의 제자들에게 산파술産婆術로 진리란 무엇인지를 가르쳤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인터뷰어 강창래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어령은 창조성이 ‘회색지대Gray Zone’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 회색지대는 예를 들어, 손등과 손바닥처럼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는 이런 생각 방식은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런 창조성과 창조적인 인물들을 제대로 길러줄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창조학교의 역할과 필요성, 그리고 그 한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넷은, 이어령의 영성이다. 그는 일흔다섯의 나이에 기독교도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당시 그가 세례를 받는 모습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감각적인 기사 제목 아래 크게 보도되었고, 이어령의 딸 장민아의 남다른 사연과 함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한국 최고의 지성, 그동안 기독교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이어령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 위’에 서 있다.

이번 인터뷰집《유쾌한 창조》에서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는 ‘문지방 위’에 선 이어령이 지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인간 예수의 모습과 영성으로 받아들인 기독교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의 극적인 과정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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